이 리뷰를 쓰기로 결정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인 요소는 다루는 제품이 인티앰프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써본 인티앰프는 제프롤랜드의 콘센트라 1이었고, 그 뒤로는 쭉 파워-프리 분리형 앰프 를 써왔다. 돌이켜보면 그간 분리형만을 고집해 왔던 데에는 점점 그레이드가 올라갔던 스피커들을 울리는 데에 아무래도 구동력이 달린다든가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내게는 좀처럼 ‘개성 있는’ 인티앰프 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DAC과 블루투스, 네트워크 기능 등을 주렁주렁 달고서 AV 리시버와 ‘실용성’ 경쟁을 벌이고 있는 시장상황에서 ‘개성 있는’ 인티앰프를 찾기란 미션 임파서블일 터이다.
그 때 만나게 된 인티가 SPEC의 RSA-M99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인티와의 만남을 통해 ‘개성 있는’ 인티앰프를 찾는 미션은 파서블하게 되었다. 이 리뷰는 따라서 RSA-M99가 어떤 개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미션이다.
무엇보다 만듦새.
가문비 나무를 사용한 섀시는 여러 모로 ‘섀시’라는, 오디오 컴포넌트의 구성요소 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기존의 경험과 상식을 기분좋게 배신한다. 대체로, 가 아니라 거의 100%의 확률로 오디오의 섀시에 목재가 투입될 때 그 위치는 측면이었다. 특히 일본 오디오 업체들의 플래그 쉽 제품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목재를 측면에 부착했다. 하지만 섀시의 진동방지를 위한 것이 라기 보다는 혈통의 고귀함을 표시하기 위함이었을 정도로, 소리보다는 디자인적인 쪽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RSA-M99는 다르다. 가문비 나무는 섀시의 양측면이 아닌 하단부에 위치해 있고, 솔리드 코어 방식 으로 가공된 가문비 하단부를 단풍나무로 제작된 풋이 삼점지지로 떠받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제작 된 섀시는 여태껏 본 적이 없다. 메이커와 제작자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렇게 섀시를 만든 이유가 ‘목 질’의 질감과 내음이 배어 있는 소리를 지향하기 위함임을 알아차릴 수 밖에 없게 되면 디자인면에서 의 개성은 10점 만점에 10점.
그럼 이제부터 셀렉터, 볼륨, 전원 스위치가 전면 패널에 가지런히 자리잡은, 리모콘조차 제공되지 않는 이 D 클래스 앰프로 음악을 들어 본 3주간의 경험을 적어볼까 한다.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전곡
피아노&지휘 : 크리스치안 찌메르만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DG 2020.12.13 St.Luke
‘당연히’ 피아노는 훌륭하다. 아니 예상을 뛰어넘는다. 찌메르만의 섬세하고 투명하면서 동시에 단단 한 – 정상급의 예술가만이 해낼 수 있는 경지, 모순된 요소들을 한 묶음으로 제시하는 순간을 충실하 게 표현한다.
피아노 레퍼토리를 ‘오디오’로 들을 때 흔히 하게 되는 오해가 피아노라는 악기가 본질적으로 차갑 다는 것이다. 굴드의, 키신의, 찌메르만의 피아노 연주가 ‘투명하게’가 아니라 ‘차갑게’ 느껴진다면 크 게는 매칭에서부터 작게는 스피커 토인이나 케이블링 등 당신의 오디오 시스템 전반을 재검토해 볼 것 을 권한다. 제대로 된 오디오라면 피아노 연주가 그렇게 들릴 리가, 아니 그렇게 들려서는 안 되기 때 문이다. 클래스 D 앰프군의 ‘냉’한 성격이 피아노와 잘 맞을 것 같으면서도 끝내는 속이 텅 빈 듯한 소리 때문에 피아노 음악 감상에 합격점을 줄 수 없었던 기억들을 떠올려보면 초유의 경험이다. RSA-M99가 클래스 D이면서도 무려 120와츠의 출력을 가진
R코어 트랜스포머를 채택했기 때문이라 짐작 해 본다.
자신이 지휘를 겸한 쇼팽 협주곡집에서처럼 찌메르만은 여기서도 번스타인-빈 필과의 협연에서보 다 훨씬 더 풍부한 표정의 피아노 연주를 들려준다. 템포보다는 셈여림과 같은 ‘표정’이
풍부해졌는데, 이런 변화가 ‘고전악파’의 대표인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들 특히 그 정점인 5번 <황제>에 적합한 것 인지는 의문이 남지만, 오디오 파일의 입장에서는 이전 버전보다 듣는 재미가 더 많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RSA-M99가 들려주는 찌메르만의 피아노 음에서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할 대목은 따뜻함이다. 마치 이 앰프의 섀시처럼, 해머가 현을 때려서 소리를 내는 이 악기의 몸통이 다름 아닌 나무임을 떠올리도 록 한다. 플러그를 꽂지 않는 악기 중에서는 가장 기계같은 피아노라는 악기의 유기물적인 성격을 이 처럼 잘 표현해 내는 앰프를 경험해 본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요즘 추세에 맞게 날렵하고 비브라토 를 절제한 LSO의 현만큼이나 찌메르만의 피아노가 자아내는 질감이 선연하다.
오케스트라의 총주로 시작되는 <황제>는 번스타인-빈 필에 비해 악단의 사이즈를 정격연주 풍으로 다이어트한 것이 확연한데, 그 힘만큼은 줄어들지 않았다. 런던 심포니 주자들의 기량이 뒷받침된 열연 못지 않게 DG 녹음팀이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찌메르만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녹음 장소가 바비칸 센터가 아님에 감사를!)
르클레르 : 바이올린
협주곡 op.10 no.2, 트리오 소나타 op.4 no.3
장 프랑소와 파야르/르클레르 기악 앙상블
Erato 1955.1.1
쿠프랭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인지도와 인기를 얻고 있는 건반음악에 비해 르클레르로 대표되는 프 랑스 바로크 음악의 바이올린 악파는 국내에서는 여전히 미지의 존재다. 등에 칼을 맞고 죽은 변사체 로 발견된(두 번째 부인의 소행으로 추정하고 있다), 음악사상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는 장 마리 르클레르는 바로크 시대의 프랑스 작곡가답게 화려한 악풍이었지만 생전부터 그의 이름 을 드높인 것은 남다른 감성이었다.
비발디의 오늘날과 같은 명성에 이 무지치가 기여한 만큼, 아니 기여도로 치면 더한 르클레르의 사 도가 장 프랑소와 파야르다. 자신의 이름을 딴 실내악단을 결성하여 아날로그 시대부터 명성이 지지 한 이 프랑스 지휘자는 르클레르 기악 앙상블을 조직하여 르클레르의 작품을 ‘발굴’했다. 에라토에 남 긴 녹음들은 그래서 음악사적인 고고학 발굴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바로크 음악, 그것도 프랑스 바로크 음악이라는 진미를 맛보고자 하는 음악팬들에게는 소문난 맛집이었다.
위너 클래식의 주체가 사실상 구 에라토가 되면서부터 학수고대해 왔던 파야르의 명연들이 속속 리 마스터링 재발매 되는 와중에 르클레르의 녹음들도 등장했는데, 이해할 수 없게도 고해상도로 재발매 된 것은 이 음원이 유일하다.
1955년이면 스테레오 초창기의 녹음인데, 낡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시대의 간극은 쓰이는 악기 가 현대 악기라거나, 영상에서의 3D 같은 입체감 보다는 2D의 정위감이 더 강조되는 대목들에서 느 껴질 뿐이다.
RSA-M99는 르클레르 기악 앙상블의 연주를 무척 전아하게 들려주는데, 이 부분이야말로 이 인티앰 프의 특징이자 강점이다. 이 앰프는 매우 투명하고 단정하면서도 개성이 강한 음색을 지녔다는 점에 서 잘 만든 ‘일본 인티앰프’라는 태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하지만, 음원의 정보가 담고 있는 본 연의 예술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잘 만든 앰프라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24비트-192kHz의 초호화 스펙을 자랑하는 이 1955년 음원은 자칫 축축 처지게 들릴 위험이 있다. 이른바 역사주의 연주를 레코드 플레이한 오디오 리뷰를 읽을 때마다 ‘스피드’라는 개념을 중심 개념 으로 삼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매우 위험한 접근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에서의 템포를 자칫 속도의 문제로 치환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템포란 시간을 어떻게 다루냐의 문제이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음악인들에게는 상식에 해당한다.
바로크 음악을 현대악기로, 특히 이 음원처럼 녹음연대가 오래될 때 자칫 늘어지게 들리도록 만드는 주범은 악기의 질감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하는 초창기 디지털 매체의 고질적인 약점이 결정적인데, 통주저음을 담당하는 쳄발로가 제대로 재생되는 경우를 나는 거의 경험해 보지 못했는데, RSA-M99는 그 드문 경험을 제공한다. 또박또박 쳄발로의 통주저음을 짚어가는 이 인티의 질감의 표현력은 당연 히 현악기들에서는 그 몸통의 떨림까지 ‘정확히’ 재현해낸다. 이
앰프의 고유의 음색 표현은 분명 존 재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음원이 지니고 있는 맛과 향을 충실히 재현해 내는 전달자로서의 능력이 이를 가능케 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현을 마찰시켜 통을 울리는, 악기의 조음방식은 가문비 나무를 솔리드 코어로 빚어낸 이 앰프의 섀 시와 환상적으로 어울린다. 흔들림 없는 단단함이 ‘울리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Fourplay – Bali Run
Warner 1991.9.17
포플레이의 <Bali Run>은 아는 사람은 아는 나만의 오디오 테스트용 음원이다. 시스템의 스피드를 섬세하게 테스트하는 데 나탄 이스트가 베이스를 맡고 있는 이 슈퍼 밴드의 이곡을 능가할 음원은 흔 치 않은 데다가, 일렉트릭 기타의 질감은 들을 때마다 리 릿나우의 악기에 플러그가 꽂혀 있다는 사실 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이 곡이 수록된 포플레이의 1집은 차세대 포맷 전쟁에서 DVD-Audio 진영의 수장격이었던 워너가 처음으로 선보인 타이틀 중에 하나였는데, CD 포맷에 비해 ‘실내악적으로’ 정치해졌다는 점이 큰 특 징이었다.
2020년에 발매된 베스트에 수록된 이 곡은 이전 버전에 비해 CD 포맷의 포워드하고 높은 음량쪽으 로 돌아갔다. 96–24에서 44–24로 바뀌기도 했지만 리매스터링의 방향성 자체가 CD 버전쪽으로 잡힌 듯 싶다.
주의할 대목은 96–24에서 44–24로의 스펙 변경을 하향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 리 릿나우어-밥 제임스-하비 메이슨-나탄 이스트라는, 초호화 구성의 뮤지션들이 빚어내는 앙상블을 ‘감상’한다는 점 에서는 이전 포맷이, 이 슈퍼 밴드의 화려한 질주와 에너지를 즐기기에는 2020 버전이 뛰어나다.
RSA-M99를 감상한 이들은 열이면 아홉 음색에 매혹된다는데, 나는 이 인티앰프가 또박또박 세어주 는 정확한 템포에 감탄하는 한 사람이었다. 이 곡은 이 앰프로 음악을 들을 때 왜 ‘즐거운지를’, 그 이유를 짚어내도록 해주었다.
케이블에 신경을 써야 할 순간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이 잘 만들어진 개성 있는 인티앰프에 붙일 스피커와 소스기기에 대해 골머리를 썩일 필요는 없어보인다. 플러그를 꽂은 악 기들을 이렇게나 부드럽고 맛깔스럽게, 그리고 정확하게 들려주는 앰프라면.
무려 샤카 칸이 보컬을 맡은 <Between the sheets>에서는 흑인음악에서 필수요소로 거론되는 끈적 끈적함이 산뜻하게(!) 표현된다. 하이엔드 오디오에서 반드시 체크해야 한다고들 하는 가수의 입크기 니 또는 가수의 위치니 하는 요소들은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이런 요소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 기가 아니다. RSA-M99에 의해 이런 부분들이 이미 수준급으로 해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저 앉아서 음악에 집중하면 된다.
르클레르/세나이에
바이올린 소나타
테오팀 랑글레르 데 스와르테/윌리엄 크리스티
harmonia mundi 2021.7.16
음악을 듣는 방식이 디지털로 바뀌면서 제일 듣기 괴로운 악기로 바이올린을 꼽지만 클래식 매니아 들 사이에서 그보다 더한 악명을 떨친 악기는 쳄발로였다. 이른바 ‘찰랑거리는’ 상쾌한 쳄발로는 90년 대 즈음에서야 겨우 들어볼 수 있었고, 녹음연도가 80년인데 악기조차 모던인데다가 여기에 라우드니 스 워의 독이 묻어있다면……
혹시라도 운 나쁘게 그런 음원들 듣고 난 참이라면 이 최신보로 귀를 씻으시길. 24-196이라는
최신 포맷으로 무장한 이 음원은 최신 기술을 활용한 현세대 녹음이 어느 정도로 ‘현장에 가까운’ 음을 들 려줄 수 있게 되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콘서트 홀에서 직접 쳄발로 음을 들은 사람들이 증언하는 ‘착 가라앉은 청명함’을 플레이 내내 들려 주는 윌리엄 크리스티의 연주를 들으면서 경악하게 될 것이다. 바이올린을 맡은 데 스와르테는 노거 장 윌리엄 크리스티가 조직한 레 자르 플로리상의 일원인 신예로 파야르가 발굴해 낸 르클레르의 바이 올린 소나타를 파야르 만큼이나 노련하게 연주해 낸다.
RSA-M99로 들어 본 르클레르의 바이올린 소나타 op.3 no.5는 음악적으로도 그렇지만 오디오 파일 의 입장에서도 황홀하다. 오롯이 데 스와르테와 크리스티만이 존재하는 듯한 무대와 피아노 연주에서 나 느낄 수 있었던 터치감이 느껴지는 쳄발로 연주의 극명한 사실성, 데 스와르테가 연주하는 1655년 산 야콥 슈타이너 바이올린의 소슬한 질감까지. 그 어떤 고해상도 포맷의 대음량 재생보다 더 가혹한 테스트를 RSA-M99는 너끈히 통과해 낸다.
RSA-M99를 통해 실로 오랜만에 인티앰프를 통해 진지하게, 무엇보다 즐겁게 음악을 들을 수 있었 다. 앞서 말했듯 이 인티앰프의 독특한 음색을 상찬하는 이들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이 앰프가 시간을 다루는 명석한 방식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내게 이 앰프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이 렇게 하고 싶다. 매우 음악적인 메트로놈.
글쓴이 – 음악
평론가 최윤구
수입원 – 체스오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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